실전도번이란
도법이란 칼을 이치에 맞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현대에 많은 유파나 단체들이 지나치게 형에 치우치거나 베기위주의 볼거리로 치우치는것에 반해 실전도법은 이론과 실기의 적절한 균형을 목표로 삼고 있다.
모든 무술에는 기본형이 있다. 형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이치에 합당해야 하며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현실성이 있다는것은 많은 실전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무술에서는 대련을 통해 그것을 입증하고 보완해 갈수 있는것이다. 저자는 30여년의 검도수련을 통해 상대와의 대련 감각을 바탕으로 실전도법을 만들게 되었다. 실전도법의 형들은 실전성에 바탕을 두고 있어 많은 불필요한 동작들을 베제하고 절제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정신수양의 방법으로도 훌륭한 역할을 함으로써 남녀노소누구나 쉽게 익힐수 있을것이다.
실전도법은 예법, 족법, 호흡법, 발도, 납도, 기본베기 그리고 지,수,풍,화,천 등을 단계적으로 수련하는 과정이며 현대인들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Why Practice Sword?
총을 사용하는 시대에 왜 칼을 수련하냐고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마치 자동차가 있는데 왜 Jogging 을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또 어떤이는 Self- Defense 개념으로 무기술은 무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 반대로 상대가 무기를 들었을 경우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영화에서처럼 혼자서 맨몸으로 여러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할때에는 무술 수련을 오직 싸움의 기술로 밖에 여기지 않기때문이다.
칼은 분명 인명살상의 도구로서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인들은 칼을 정신과 육체를 수련하여 인격을 완성시키는 도구로서 발전 시켜왔다. 오직 칼만이 갖고 있는 선과악의 이중성, 그것을 다루기 위한 강인한 정신을 익히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칼을 수련하는 목적일것이다.
What are the benefits to practice sword?
궁극적으로 칼을 수련하는 목적은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있겠지만 특히 현대사회에서 칼을 수련하는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실전도법의 수련을 통해 어떤 Benefit 얻을 수 있을까?
우선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선 스트레스 해소와 집중력을 말할 수 있다. 칼은 위험한 무기이므로 약간의 불안감과 긴장감이 생긴다. 자칫 방심하면 다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중을 안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을 잊고 오직 한가지에 몰두 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몸의 발란스와 자세교정이다. 특히 실전도법의 모든 자세가 가슴과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몸의 중심을 낮추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세교정과 몸의 발란스를 바르게 할 수 있게 된다.
중급정도의 진도가 나가면 Set JI(地)에선 氣 와 호흡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는데 몸의 기에너지를 충만하게 만들고 바른 호흡을 통해 건강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Set SOO(水) 에선 유연성과 불필요한 힘을 빼는 것 그리고 힘의 강약과 리듬감에Point가 맞추어져 있으며,
고급단계인 Set POONG(風) 에선 짧은 순간의 힘의 집중력,임펙트를 주는 방법을 알게된다. 이것은 단전에 기가 충만한 상태에서 순간적인 파괴력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Set Hwa(火) 에서는 앞에서 배운 기의 운용, 호흡법, 유연성과 힘의 강약, 그리고 순간 힘의 집중력 등을 총 동원해 몸의 기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려 짧은 시간에 최대의 운동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외에 정신적인 부분은 Chapter 4를 보면 실전도법의 수련이 정신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여기에선 생략한다.
Who can practice Sil Jeon Do Bup?
실전도법의 수련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 주위가 산만한 사람, 몸의 기운이 약한 사람, 자세가 좋지 않은 사람, 대련이나 지나친 경쟁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 자신감이 없는 사람 등이 부담없이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30여년 검도 수련을 해왔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왔다. 실전도법은 분명 수련하는 동안 인생에 많은 즐거움과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바라건데 사람들에게 이 책이 정신과 육체적으로 보템이 되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 되었으면 한다.
글 : 교사 7단 성 진규.
실전도법은 지,수,풍,화,천 5단계로 나누어졌다. 물론 첫 단계 地를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인 동작과 자세를 배우지만 본격적인 수련은 地의 단계서부터이다. 그럼 각 단계별 수련의 목표와 어떤 마음 공부를 할 지 알아본다.
1.地 나를 내려놓는다.
地는 땅이다. 땅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시작이며 끝이다. 이것은 기본이고 배움의 첫 단계이며, 근본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배움의 자세를 알아야 하고 인간 상호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배움의 자세란 무엇인가? 배움이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위해선 내 것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내 것을 내려놓으려면 가르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며 나를 내려놓는 겸허함과 나를 돌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배움의 단계에 ‘수파리(守破離)’라는 말이 있다.
(수파리 – 불교 용어에서 건너와 무도 수행의 단계를 표현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수(守)’란 ‘가르침을 지킨다’라는 의미.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정해진 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게 몸에 익히는 단계를 말한다. ‘파(破)’는 원칙과 기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틀을 깨고 자신의 개성과 능력에 의존하여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 가는 단계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수련은 다분히 의식적이고 계획적이고 작위적인 수준에 행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 단계인 ‘리(離)’는 파의 연속선상에 있지만, 그 수행이 무의식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단계로 질적 비약을 이룬 상태이다. 자신도 모르게 ‘파(破)’를 행하되, 모든 면에서 법을 잃지 않고,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름을 뜻한다. 수련의 최후단계이다.)
정해진 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게 몸에 익히는 단계 이 守의 단계가 없이는 배움의 본질에 접근 할 수 없을 뿐더러 자만과 교만에 쉽게 빠질 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해 할 수 없다. 도장에서는 배우는 처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사제지간의 관계인데, 이것은 검은색을 흰색이라 해도 절대적인 신뢰로 받아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시작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관계가 나아가 선후배나 상호간의 관계로 이어지면서 관계를 넓혀가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집에서 동네로 학교로 직장으로 이어지며 관계를 넓혀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전도법의 地의 동작들은 칼의 기본이며 누구나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가장 그 틀에 맞추어 원칙과 기본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2.水 물처럼 흘린다.
水는 물이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우리 몸도 정신이 고여있으면 몸이 상한다. 자기 고집이 너무 강해 다른 이들과 융화하지 못해 계속 마찰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우리 몸도 온전할 수 없다. 물은 둥글든 네모든 어느 용기에 부어도 그 물의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우리 정신도 이와같이 유연성을 가지고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있는 오픈된 마인드를 갖지 못하면 그 틀을 벗어나는 큰 발전은 생각할 수 없다.
실전도법의 水의 동작들은 칼의 흘림체를 연습하는데 몸을 부드럽고 큰 동작으로 유연함에 유념해야 한다.
3.風 바람처럼 멈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불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이 風의 수련에서는 끊고 멈춤을 공부한다. 우리의 생각은 무한하고 공짜라는 생각을 하지만 전기를 쓰듯 우리의 생각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다. 쓸때없는 생각에 꽉 차있어서 더이상 발전적인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고, 과거의 기억에 메달려 현재를 계속 괴로워 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미래의 불필요한 걱정에 사로잡혀 현재에 안절부절 하면서 내 생각을 그렇게 다 써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생각(정신)의 낭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검도에 마음의四戒라는 말이 있다.
마음의 사계(四戒)란 경구의혹(驚懼疑惑)의 네가지 삿된 마음을 경계하는 말을 말한다.
이 네 가지 마음이 생기게 되면 상대의 틈을 발견해 낼 수 없거나 자기 자신도 위축되어 활동의 자유를 잃는다. 또 정신이 통일되지 못하여 상대방으로부터 타격을 당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상태가 되지 않도록 검도에서는 마음의 공부로 가르치고 있다.
(1) 경이란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하여 마음의 평정이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2) 구란 공포이다. 상대의 신체가 장대함, 기합이나 허세에 대하여 공포감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3) 의란 상대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의심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결단이 서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4) 혹은 마음이 헷갈려 신속한 판단이나 경쾌한 동작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검도 대련에서 불필요한 마음과 잡념을 추스리고 끊어내지 못하면 들고 있는 죽도는 한낱 작대기에 불과할 것이고,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대나무로 만든 죽도도 날이 선 진검이 될 수도 있다.
실전도법의 風의 동작들은 예비동작들을 최소화 시킨 간결하고 짧은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동작들을 수련하며 마음을 끊고 멈추어 공백을 만드는 수련을 해야 한다.
4.火 불처럼 타오른다.
불은 에너지다.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과 같은 것이다. 차의 값어치는 엔진의 성능에 좌우한다. 엔진이 약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멀리 갈 수도 없는 엔진이 있고, 엔진에 힘이 넘쳐 어디든 힘차게 갈 수 있는 차도 있다. 사람도 차의 엔진처럼 꿈이 크고 매사에 열정과 자신이 넘치는 사람이 있을테고, 그와 반대로 의욕도 자신감도 추진력도 없는 사람이 있다. 실전도법의 地와 水를 통해 내려놓음과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준비의 단계를 거쳐 불필요함을 끊고 절제하여 마음의 여백을 만드는 風의 단계를 거치면 비로소 그 공간에 채워야 할 긍정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이 火의 단계이다. 마치 성능좋은 엔진처럼 창조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나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실전도법의 火의 동작들은 기운차고 연속된 동작들로 이루어져있다. 속에서 불이 타오르 듯 내면의 힘찬 에너지를 생성해 내는 수련을 해야 한다.
5.天
地水風火의 수련이 마음을 내려놓고 받아들이기도 하며, 멈추고 비워놓기도하며 그 빈자리를 긍정의 에너지를 채우는 것이라면 이것은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 하면서 ‘마음 부리기’를 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天의 수련은 무엇일까? 天은 하늘이고 하늘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아름답고 깨끗한 것, 밝고 따뜻한 것 뿐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것, 어둡고 차가운 것까지도 용납하고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것에 존재의 이유가 있기라도 한 것 처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을 내가 컨트롤하고 나의 주체가 나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나가 아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이다. 그래서 나의 天이 있고, 너의 天이 있으며,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며, 하늘이기도 하고 땅이기도 하다. 지키고 쫒아가는 마음 부림이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유로움이기도 하다. 매듭과 틀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 있고 내가 있고 어우러짐이 있다. 나의 天이 있고 너의 天이 있다. 나도 天이고 너도 天이며. 天도 天이다.
ㄴㄴ
- 총을 사용하는 시대에 왜 우리는 칼을 배울까?
총을 사용하는 시대에 왜 우리는 칼을 배울까하는 질문을 해본다. 칼을 수련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알기위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명제이다.
단지 운동적인 측면이라면 달리기도 있고 역기를 들 수도 있고 흔한 구기종목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운동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해보아야 더 근접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수련하는 칼(도법)은 문명이 발달하기 전의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통의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거창한 명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최소한 실전도법은 그렇다) 여기에는 목숨을 내놓고 생사를 전제한다는 긴장감과 두려움, 의연함과 절박함 이런 극한 상황들을 가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거나 산다는 매우 단순명확하고 원초적이며 모든 것을 걸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절실함 같은 것들이다. 죽음앞에서는 부귀나 명예도 신분과 지휘도 다 부질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시작과 끝이며, 완전한 비움이고 내려놓음이다. 죽으면 끝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다른 무엇이 중요할 수 있는가? 세상의 부귀와 영화도 근심과 걱정도 나의 죽음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가상을 통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근심이나 고통을 내려놓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죽는마당에 갈등과 노여움과 원망과 욕심이 무슨 대수며 내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운 문제이겠는가? 이렇듯 죽음앞에선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는 스트레스와 고통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줄일 수도 있고 작게 만들 수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뇌가 눈으로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시공을 초월하여 생사를 전제한 가상이(수련의 정도차이는 있겠지만) 그 에너지를 똑같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역기를 들고 달리기를 하면서는 연결시키기 어려운 근본적인 질문에 칼이란 소재로 목숨이라는 마지막을 가상하며 에너지를 극대화하여 고통의 크기를 조절하고 통제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총을 사용하는 시대에 칼을 배우는 이유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내 정신의 주체됨이며 정신의 자유로움을 찾고자하는 것이다.